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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한라 아이스하키팀 레전드의 고별식

10월 12일 안양아이스링크에서는 한라와 대명 킬러웨일즈의 2019~20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정규리그 10라운드 경기가 열렸다. 접전 끝에 경기에서는 한라가 1-3으로 졌지만, 결과를 떠나서 안양 한라 구단, 그리고 한국 아이스하키에 많은 의미가 있는 하루였다.

 

한라 레전드의 고별식

2007~08 시즌 성적이 좋지 않았던 안양 한라 아이스하키 팀은 2008년 대대적인 혁신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새로운 외국인 선수가 있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키치너 출신의 브락 라던스키. 북미 프로리그와 독일, 스위스리그를 거친 라던스키는 2008년 9월 안양 한라 입단을 결정했다.

NCAA 명문 미시건주립대 출신에 2002년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에드먼턴 오일러스 팀에 지명 받은 경력이 있음에도 아시아리그를 선택한 것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라에 입단한 라던스키는 자신과 구단, 대한민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운명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입단 첫 시즌에 정규리그 MVP에 오른 라던스키는 두 번째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MVP를 차지하며 팀을 챔피언에 올려놨다. 2013년 3월에는 외국인으로는 한국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 대표팀의 일원이 됐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2013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 대회에서 3골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대표팀이 역대 최고 성적(5위)을 내는데 기여했다. 라던스키는 안양 한라 유니폼을 10년간 입었고 4번이나 챔피언에 올랐다.

2019년 10월 12일, 안양 한라의 푸른 유니폼을 10년간 입은 브락 라던스키의 공식 은퇴식이 안양 아이스링크에서 열렸다. 아내 켈리와 함께 안양 아이스링크에서 선 라던스키는 “한국은 나의 두 번째 고향이다. 한라에서 이룬 많은 성공들이 정말 자랑스럽고, 한국 대표팀으로 올림픽에 출전하게 돼 꿈을 이뤘다”고 감격에 찬 소감을 밝혔다.​

푸른 눈 태극 전사의 사연

동계 올림픽 개최를 향한 대한민국의 노력은 삼수(三修) 끝에 2011년 7월 이뤄졌다. 그러나 동계 올림픽 최고 인기 종목인 아이스하키의 대회 출전 여부는 불투명했다.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은 올림픽 출전 조건으로 ‘한국 아이스하키가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을 입증하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단기간에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외국인 선수의 귀화가 검토됐고 2013년 3월 브락 라던스키가 체육 분야 우수 인재로 법무부 승인을 얻어 한국 스포츠 사상 순수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표팀에 선발됐다.​

라던스키는 2013년 4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2013 IIHF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에서 5경기에 출전 3골 2어시스트를 올리며 맹활약했고, 한국은 역대 최고 성적(5위)을 거두며 IIHF에 ‘올림픽 출전권’에 대한 면목을 세웠다.

대표팀에서 맹활약한 라던스키의 긍정적인 효과는 제 2, 제 3의 귀화 선수로 이어졌다. 2014년 1월 마이클 스위프트와 브라이언 영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 아이스하키 대표팀에 합류했다. 이어서 2015년 마이크 테스트위드, 2016년 에릭 리건과 맷 달튼이 국적을 취득해 태극 마크를 달았다. ‘푸른 눈 태극 전사’의 스타트를 라던스키가 끊은 셈이다.

 

한국 아이스하키의 버팀목 안양 한라

대한민국 아이스하키의 2011년 랭킹은 33위에 불과했다. 2019년 현재 랭킹은 무려 17위까지 올라왔다. 이 같은 괄목상대를 가져온 팀이 안양 한라다. 2003년 국내 실업 아이스하키 팀의 잇단 해체로 홀로 남은 한라는 일본 팀과 연합 리그를 모색한다.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출범의 계기다. 일본 4개 팀과 함께 하기로 한 한라의 결단이 오늘날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를 만들었다.

한국 아이스하키는 당시만 해도 객관적 전력에서 일본에 한 수 아래로 여겨졌다. 2003~04 시즌 개막전에서 한라가 고쿠도에 당한 1-11의 참패가 당시 한국과 일본의 아이스하키 수준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러나 한라는 패배를 거듭하며 꿋꿋이 버티고 성장했고, 결국 일본 팀을 따돌리고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최고 명문 팀으로 자리잡았다.

한라는 2008~09 시즌에 처음으로 정규리그 1위에 올랐고 2009~10 시즌에는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2010~11 시즌에는 도호쿠 프리블레이즈와 공동 우승(도호쿠 대지진으로 파이널 무산)을 차지하며 2연패에 성공했고, 2015~16, 16~17, 17~18 시즌에는 사상 최초의 3연속 챔피언에 올랐다.

한라의 성장은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대표팀은 2015년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서 열린 2015 IIHF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B에서 우승했고 2016년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린 IIHF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꺾는 쾌거를 일으키며 역대 최고 성적(승점 7)을 냈다. 이어 2017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IIHF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에서는 2위를 차지하며 월드챔피언십 승격의 개가를 이뤘다.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2018 평창 올림픽에서 세계적인 강호 체코(1-2), 핀란드(2-5)에 패배하기는 했지만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놀라운 성장을 확인시켰고 2019 IIHF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에서는 강호 슬로베니아(5-3)와 벨라루스(4-1)를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

마력의 스포츠, 아이스하키

‘아이스하키를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번 만 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다. 아이스하키의 치명적인(!) 매력을 제대로 표현한 문장이다.

현존하는 스포츠 중에 경기 전개가 가장 빠른 종목이 아이스하키다. 모든 선수가 전력을 다해 뛰고, 에너지를 불태운다. 경기 시작부터 끝나기까지 절정의 스피드가 유지되는 유일한 종목이 아이스하키다. 40~50초 간격으로 선수 교체가 이뤄지고 빙판에 나선 선수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불사른다. 다른 종목이 대체할 수 없는 아이스하키 만의 마력이 발생하는 까닭이다.

아이스하키만큼 팀 스포츠를 강조하는 종목이 없다. 한 두 명의 스타 플레이어에 의존해 승리할 수 없는 종목이 아이스하키다. 경기에 투입되는 20명의 선수 모두가 자신의 몫을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른바 ‘벤치 멤버’가 없는 종목이다. 각자에게 맡은 임무가 있고, 그 임무를 완수해야 팀이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이스하키의 매력이다.​

꿈을 이룬 리그,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안양 아이스링크는 국내 아이스하키 팬들에게는 ‘성지’로 통한다. 대한민국 아이스하키의 성장과 발전이 모두 이곳에서 이뤄졌다.

2003년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출범 당시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정규리그 우승, 챔피언 등극, 정규리그 MVP, 플레이오프 MVP, 득점왕, 포인트왕(골+어시스트) 배출 같은 일이 모두 안양 아이스링크에서 이뤄졌다. 1,200명 남짓 수용할 수 있는 작은 아이스링크지만, 이곳에서 보낸 16년 세월 동안 안양 한라도, 대한민국 아이스하키도 괄목상대할 성장을 이뤘다.

아시아리그 출범 당시만 해도 일본 팀을 상대로 1승도 거두기 어려웠던 한라는 성장을 거듭해 리그 최고 명문으로 자리잡았고 무려 5번의 챔피언에 등극했다. 2003년 일본 4개 팀과 함께 리그를 출범할 때만 해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다.

안양 한라의 홈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안양 아이스링크에서는 ‘아이스하키 축제’가 벌어진다. 16년간 끈끈히 이어져온 한라 팬들의 열정이 불꽃을 피운다.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출범 이후 가장 많이 챔피언에 오른 팀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 승부와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스하키 팬이라면,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와 안양 한라의 존재 자체가 즐거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