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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GHT

각져야만 잘 달리나요? 전기차 배터리 말 많은 이유

‘앞으로 폭스바겐 전기차는 각형 배터리를 사용할 것입니다.’

지난달 열린 폭스바겐 그룹의 ‘파워 데이 (Power Day)’에서 불거진 이 소식은 국내 전기차 배터리 업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각형이 아닌 파우치형 배터리를 주력 생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폭스바겐은 각형과 파우치형 배터리를 혼용해 왔습니다. 이에 국내 기업인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파우치형 배터리를 공급했는데요. 하지만, 폭스바겐의 변심으로 이들의 파트너십은 일회성에 그치게 됐습니다.

배터리의 일원화와 내재화를 선택한 폭스바겐 그룹 (출처: 폭스바겐 그룹)

발표에 따르면 폭스바겐 그룹은 2030년까지 자사 판매 전기차의 80%를 새로운 각형 배터리로 만들 예정입니다. 또한 유럽 내 배터리 공장 6개를 지어 배터리 물량을 조달할 방침입니다. 폭스바겐 그룹이 전기차 시장 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만큼, 국내 전기차 배터리 업계의 상황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인데요. 폭스바겐이 이와 같은 선언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를 살펴보기 위해선 먼저 배터리 타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전기차 배터리 타입 별 바로 알기

배터리는 크게 원통형과 각형, 파우치형으로 나뉩니다. 주요 제조사명에서 알 수 있듯 한국과 중국, 일본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데요. 서로 주력하는 배터리가 다릅니다.

1. 원통형 배터리
먼저 일본 파나소닉이 생산하는 원통형 배터리는 가장 전통적인 형식의 배터리입니다. 배터리 소재를 돌돌 말아 원통형 케이스에 집어넣은 것으로 그 모양이 AA 배터리와 유사합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사이즈가 규격화됐으며 가격이 저렴하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죠. 단, 소형으로만 제작할 수 있어 전기차에 사용할 경우 다수의 원통형 배터리를 하나로 묶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때 추가 비용이 발생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데요. 게다가 잦은 충·방전 시 성능이 빠르게 저하되는 단점도 발생합니다.

2. 각형 배터리
각형 배터리는 중국의 CATL이 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선 삼성SDI가 생산하지만, 점유율 면에서 CATL과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원통형과 달리 배터리 소재를 접어 사각형 알루미늄 케이스에 집어넣어 만드는데요. 금속 외관 덕분에 외부 충격에 강하고 내구성이 좋으며 대량생산에 유리합니다. 반면, 무겁고 열 방출이 어려워 별도의 냉각 장치가 필요합니다. 또 에너지 밀도가 낮아 주행 거리가 짧죠.

3. 파우치형 배터리
마지막은 우리 기업이 주력하는 파우치형 배터리로 세 가지 중 가장 높은 에너지 밀도를 자랑합니다. 따라서 한번 충전으로 가장 멀리 달릴 수 있는데요. 파우치형은 다른 배터리처럼 소재를 접거나 마는 대신 소재를 겹겹이 쌓아 얇은 비닐 주머니에 밀봉합니다. 그 결과, 얇고 가벼우며 접는 등 형태를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습니다. 파우치형 배터리의 단점은 독특한 내부구조로 대량 생산에 불리하다는 점입니다. 소재를 쌓는 게 말거나 접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든다고 하는데요. 이에 공정 단계도 추가돼 생산 원가가 높습니다. 더불어 각형, 원통형에 비해 내구성도 약한 편입니다.

 

결국 원인은 비용

배터리마다 장단점이 존재하므로 무엇이 더 좋고 나쁜지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성능이 아닌 다른 외적 요인이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큰데요. 폭스바겐 그룹이 중요하게 여긴 건 ‘비용 절감’이었습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쉐보레 볼트EV는 배터리가 제조원가의 43%를 차지 (출처: 쉐보레)

업계에 따르면 전기차 가격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40% 정도라고 합니다. 전기차 대중화를 위해 세계 각국이 보조금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이것이 영구히 지속될 것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보조금 정책은 언젠가 끝이 나기 마련인데요. 이를 대비하기 위해 업계는 배터리 원가를 낮춰야만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파우치형 배터리는 부담스러운 존재입니다. 생산 원가가 가장 높은 데다 기술 난도도 높아 아무나 만들 수도 없습니다. 즉, 제조사의 풀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기차 시대가 도래하면 연간 수십만 대의 전기차를 생산해야 하는데요. 이 점을 고려하면 대량 생산에 유리한 각형 배터리가 더 낫다는 분석입니다.

중국 측의 압박도 각형 배터리 선택에 힘을 보탰습니다. 중국 정부는 자국에 판매하는 전기차에 자국 배터리를 사용하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전기차 시장이 중국인 것을 고려하면 이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데요. 이 점이 파워 데이 발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특허 침해 소송으로 공장 설립에 차질을 빚은 SK이노베이션 (출처: SK이노베이션)

또 다른 이유는 국내 기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기차 라인업이 크게 늘며 배터리 물량 확보가 어려워졌습니다. 이에 제조사가 얼만큼의 물량을 내줄 수 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죠. 문제는 우리 기업의 장기 소송으로 불안 심리가 퍼졌다는 것입니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영업 비밀 및 특허 침해를 두고 2년여의 소송전을 벌였는데요. 제조사가 손에 꼽히는 현 상황에서 소송 기간 연장이나 패소로 인해 배터리 공급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면 이를 대처할 방안이 없는 상황입니다. 전기차 시장이 속도전의 양상을 띠는 만큼, 안정적 배터리 공급은 무엇보다 중요한데요. 이에 폭스바겐 그룹은 각형 배터리 내재화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가 들어간 GM ‘울티움(Ultium) EV 배터리 시스템’ (출처:GM)

그러나 속단하기는 이릅니다. 배터리는 소재와 양산 기술이 중요한데, 후발 업체가 단시간 내 선발 업체의 생산 수준을 따라잡긴 사실상 어렵습니다.

폭스바겐 그룹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각형 배터리를 메인으로 선택했지만, 파우치형 배터리의 몫을 조용히 남겨두었습니다. 폭스바겐이 올해 국내 기업으로 공급받을 전기차 배터리 물량은 총 400GWh입니다. 이 중 309GWh를 먼저 발주하고 90GWh가량은 나중에 발주하기로 했는데요. 자체 배터리 생산이 순조롭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분석됩니다.

 

신재생 에너지 시스템 구축하는 경제 패러다임 전환 계획을 발표한 조 바이든 대통령 (출처: CNBC)

향후 수요에서도 희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중국과 미국의 국제 관계 악화로 중국 배터리 기업의 미국 진출은 사실상 막혀 있습니다. 이에 우리나라 배터리 업계가 성장 중인 미국 시장을 선점할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다행히도 현재 국내 배터리 기업의 장기 소송이 마무리되며 시장에 순풍이 불고 있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에 삼성SDI까지 미국 거점 건설을 검토하고 있는데요. 배터리 기술 발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죠. 이에 업계는 폭스바겐 사태가 생각만큼 골치 아픈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인데요. 전기차 시장이 빠르게 격변하는 만큼 어느 기업이 배터리 내재화를 선언할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한국 배터리 업계가 풀어야 할 과제는 K- 배터리의 신뢰를 회복하고 그 저력을 보여주는 것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