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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의 발자취] 제2장. 한라그룹, 한국 기계공업을 선도하다.

BRAND 2020. 4. 25.

한라그룹은 창업기(1962~1969)에 사업기반을 구축하며, 1970년대 들어 그 영역을 꾸준히 확대합니다. 자동차 부품과 기계공업의 기술 국산화를 추진하고 안양기계공장 증설을 비롯해 군포와 창원에 종합기계공장을 건설하면서 대량생산 체제를 갖춥니다. 

특히, 세계적인 규모의 초대형 플랜트공장인 창원종합기계공장 건설을 추진하면서 국제 기계공업사상 최초의 시멘트플랜트 수출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내는 등 한국 중공업의 새 역사를 열었습니다. 이로써, 정인영 명예회장이 지향하던 중화학공업 입국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사업기반은 1970년대에 전반적으로 구축된 것입니다.

1. 국내 최초로 건설 중장비를 생산하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현대양행은 안양기계제작소의 자동차 부품 생산이 본궤도에 오르며 기계공업으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갑니다.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기계공업이 꼭 필요하다는 산업보국 정신으로 기계공업에 과감히 뛰어든 것입니다. 

특히, 현대건설 사장으로 1965년 국내 최초의 해외 공사인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해 수행했던 정인영 명예회장은 당시 건설 중장비의 국산화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했습니다. 많은 해외 공사를 수행하면서 선진 기업들이 사용하는 유압식 신장비에 비해 시설이나 장비 면에서 큰 격차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건설업을 위해서도 기계공업은 선결 과제이다.

비의 현대화를 이루지 않고서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은

그 목표 자체가 웃음거리일 뿐인다." 

1970년 봄, 안양공장과 가까운 군포에 주물공장 건설에 들어가 착공 1년여 만인 1971년 1월 가동에 들어갑니다. 이를 기반으로 중기공장, 대형 플랜트공장을 단계적으로 세워 중공업 기반을 갖춘 다음 최종적으로는 세계적 플랜트 수출을 주력 사업으로 해나가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기계공장을 1972년 6월 완공하고 그 해 11월 국내 최초로 트럭크레인을 생산하면서 건설 중장비 국산화 시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군포공장은 이후 1973년 1월 주조공장, 1974년 10월 중기계공장, 1976년 8월 경기계공장을 차례로 준공하며 한국 최고의 기계공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미국 업체와 기술제휴도 이어졌습니다. 아메리칸 호이스트 사와 트럭 크레인 기술제휴를 시작으로 1974년 2월 프랑스 포크레인 사와 굴삭기 생산에 이어 6월에는 피아트 앨리스 사와 제휴로 불도저, 휠로더 생산에 들어 갑니다. 이런 기술제휴에 힘입어 1975년 1월 지게차 국산화에 성공하게 됩니다.

 

"명예회장님께서는 최첨단 시설이어야만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기술도 경험도 없으니 설비가 좋아야 한다는 지론이셨죠. 때문에 군포공장은 공장건설, 설비, 기술 모두 일류로 진행했습니다. "

(한상량 전 한라펄프제지 사장)

이후 군포공장에서는 불도저, 엑스카베이터, 모터그레이더, 트럭크레인, 크롤라크레인 등 건설중장비를 비롯해 전기고가 이동 크레인, 포크리프트트럭, 포테이너 등 운반하역 기계, 크러싱 플랜트, 아스팔트 플랜트 등 광산•건설 기계를 생산하는 대규모 공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1978년 국내 최초로 중장비를 해외로 수출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이때 상표를 ‘HALLA’로 정하며 ‘한라’의 이름이 처음 등장합니다.

그 당시 기업들은 투자비가 많이 들고 성과를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국내 어느 기업도 기계공업을 비롯한 중공업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공업을 육성해야 한국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정인영 명예회장의 꿈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현대양행은 군포 기계공장 건설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산업지형을 바꿔놓고 있었습니다.

 

2. 국내 최대 단일 종합기계공장을 건설하다

현대양행은 군포공장이 소재에서 완성품에 이르는 시스템을 어느 정도 갖추자 본격적인 플랜트 사업 구상에 착수합니다. 군포공장을 국내 최대의 종합기계공장으로 대형화, 현대화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마침 그 계획을 앞당기는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1973년 1월 정부가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미 중공업을 지향하고 있던 현대양행에는 기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중화학공업은 국가경제 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기계산업을 축으로 하는 기업은 결국 중공업을 육성해야 세계시장을 뚫을 수 있다.

그것이 당시 한국 실정에 가장 잘 맞는 정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자금이었습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곧바로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아시아개발은행(ADB) 본부로 날아갔습니다. 1973년 2월이었습니다. ADB는 차관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놓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차관의 규모도 규모지만 민간 기업의 차관 요청 자체가 ADB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힘든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낙관의 밑바탕에는 이번 계획이 정부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부합하는 일로 정책적 지원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AID차관 교섭 때 인연을 맺은 계봉혁 박사의 도움으로 ADB 관련 인사들을 만날 기회를 얻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20분 남짓, 그 짧은 시간 안에 사업의 타당성과 장래성을 설득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먼저 정인영 명예회장은 공장 건설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연건평 3만 평의 종합기계공장을 지어 플랜트 수출을 주도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사업성을 전하는 대신 뜻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자신의 현대건설 시절 AID(국제개발처) 차관 경험을 들려준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민간기업 지원에 대한 정당성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특히 그는 1962년 AID 차관으로 현대건설은 플랜트 건설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는 해외시장 진출로 이어져 국내 건설업은 물론 한국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을 예로 들었습니다. 실제 1960년대 초반 한국 건설업의 성장률은 한국 GNP 7.8%를 훨씬 앞지른 14%로, 국내 경제는 건설업에 의해 주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갑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기계산업을 축으로 하는 중공업 육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번 차관이 그 출발이 될 것입니다."라며 한국의 경제 발전에 ADB가 일조한다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시큰둥하던 그들의 태도에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ADB로부터 내부적으로 검토해보고 연락하겠다는 답변을 받습니다. 차관 교섭에서 이 같은 약속은 반 성사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습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1974년 10월 현지조사 내한과 두 달 뒤 ADB 평가조사단 내한으로 이어졌습니다. 군포와 안양공장 둘러본 그들은 국내산업 현황 점검과 상공부 협의를 거쳐 잠정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1975년 6월, 현대양행은 마침내 민간 기업 최초로 아시아개발은행(ADB)에 1,750만 달러의 차관계약을 체결했습니다. 

1975년 6월 10일, 드디어 군포 종합기계공장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연면적 9만 9173㎡ 규모의 군포공장은 경중기계류(輕重機械類)와 그 연관제품, 건설 중장비 및 각종 공작기계, 시멘트·섬유기계·운반하역 설비 등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 단일 종합기계공장으로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군포 종합기계공장은 기존 군포공장을 증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워낙 커 새로운 공장을 건설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나라 기술수준으로는 어려운 일이라고 했습니다만 보란 듯이 완공함으로써 중공업 입국의 실현을 앞당겼습니다." (유병철 전 한라중공업 부사장)

안양의 외진 곳에 공장을 지은 지 10년,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지 5년 만에 이룩한 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