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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의 발자취] 제1장. 한라그룹, 한국 중공업의 씨앗을 뿌리다 .

BRAND 2020. 4. 21.

꿈은 신념을 낳습니다. 신념은 꿈의 자식입니다. 신념이 없으면 추진력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추진력 또한 꿈의 자손입니다. 모든 게 꿈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중공업 입국을 통해 한국경제를 일으키겠다는 꿈을 품은 정인영 명예회장은 1962년 10월 1일 주식회사 현대양행을 설립했습니다.

이후 한국 최초의 건설 중장비를 생산하고, 공장을 짓는 공장인 창원공장을 건설해 대한민국 중공업 역사의 새장을 열었습니다.그의 꿈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지금은 건설 사업과 자동차부품 사업을 양대 축으로 ‘한라’의 이름을 세계에 떨쳐 나가고 있습니다.

한라의 역사를 알아보는 한라의 발자취, 그 첫 번째 장은 정인영 명예회장의 미국 워싱턴 방문으로 시작합니다.

 

1. 중공업 입국의 첫발을 내딛다.

1961년 12월 미국 워싱턴 AID(국제개발처) 사무실. 한국 기업 최초 미국 AID 차관 도입에 성공한 정인영 명예회장(당시 현대건설 부사장)은 차관 성사에 도움을 준 AID 한국담당인 레이먼드 말리에게 미국의 주요 산업시설 견학을 부탁했습니다.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미국의 힘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한국이 전쟁의 상흔을 딛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지를 모색해보고 싶었습니다.

레이먼드 말리의 도움으로 미국 동부의 공업지대를 둘러본 그는 충격과 놀라움에 휩싸였습니다.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된 대규모 공장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차관 성사의 덤으로 이뤄진 미국의 공업도시 견학은 정인영 명예회장에게 한 가지 뚜렷한 확신을 심어줬습니다.

 

"한국 경제의 미래가 바로 이런 중공업에 있구나.

내가 가야 할 길은 중공업이다."

 

1962년 10월 1일, 정인영 명예회장은 ‘5대양 6대주를 넘어 나아간다’는 뜻을 담아 ‘현대양행’이라는 사명의 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것이 중공업을 통해 한국경제 발전을 이룩하겠다는 꿈을 향한 첫걸음이었습니다.

 

2. 중공업을 향한 꿈의 길목, 안양 기계제작소

현대양행은 무역업으로 출발했습니다. 건설용 기자재, 건설장비, 산업기계 등의 수입과 형석, 시멘트 수출 등 현대건설의 일을 주로 맡았습니다. 목표로 한 중공업 입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술 축적과 기계공업에 대한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1964년 12월 17일 양식기 공장을 준공하고 안양 기계제작소라는 간판을 달고 스푼, 나이프, 주전자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양행은 안양 기계제작소의 가동과 함께 탄력적으로 성장해 갑니다. 당시 세계 양식기 시장의 선두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이 소규모 가내수공업 생산 방식이었던 데 비해 현대양행은 현대식 시설과 대량 생산체제를 앞세워 품질과 가격경쟁으로 그들을 앞지를 수 있었습니다.

1968년에는 처음으로 영국 런던에 지점을 개설함으로써 본격적인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습니다. 우리기업의 해외 현지화 효시였습니다. 1972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일본 도쿄 지점 개설로 이어져 국제무대 진출이 더욱 활기를 띠었습니다.

양식기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수출 실적을 높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도 수출산업에 이바지한다는 긍지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계공업에 대한 정인영 명예회장의 관심과 열망은 커져갔습니다.

 

3. 자동차부품 제조 사업에 진출하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제사회의 기계공업 추세를 탐색합니다. 자동차 산업과 중공업이 미래 산업을 이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지금이 기계공업을 시작할 적기임을 직감하게 됩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습니다.

포드사가 1966년 한국 진출을 위해 시장조사 겸 한국 파트너를 물색하러 온 것입니다. 조사단은 신진자동차 김창원 씨와 삼성 등 4,5개 회사를 목표로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현대건설 부사장이었던 정인영 명예회장은 현대를 한국 측의 협상 파트너 중 하나로 만드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 무렵 현대건설은 자동차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 포드의 접촉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포드 측 조사단이 묵고 있는 조선호텔로 찾아갔습니다. 현대건설의 자동차 산업에 대한 관심과 조건을 내세워 설득을 시작했습니다. 미국 포드 본사도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그 결과 현대자동차는 포드와 자동차를 생산 판매한다는 합의를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해 12월 현대는 자동차 회사를 세웠고, 1967년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코티나’였습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현대자동차의 탄생 과정에 관여하면서 한 가지 다른 결론을 얻습니다.

 

자동차 산업의 핵심은 부품에 있다.

부품 국산화를 이뤄야 자동차공업의 국내 정착이 가능하다.

그는 자동차 조립은 엄격하게 말하면 생산기술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자동차 산업의 본질은 부품 생산에 있다고 봤습니다. 당시 국내에는 자동차 부품 업체가 전무한 실정이었습니다. 부품 국산화를 한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모색할 수 있는 돌파구로 생각한 정인영 명예회장은 1968년 봄, 안양기계제작소에서 자동차부품 개발을 지시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합니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할 계획입니다.

항상 2,30년을 내다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양식기 생산은 오늘의 도약을 위한 워밍업이었습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동차 전반에 대한 기술을 공부하고, 자동차부품 생산라인을 갖추도록 하십시오.

-1968년 봄, 정인영 명예회장-

현대양행 직원들은 전세계 유수의 자동차공업 현장을 돌며 부품 생산 준비에 돌입합니다. 우선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양식기 생산라인을 자동차부품 생산라인으로 바꾸었습니다. 프레스와 금형제조 설비를 활용해 히터박스, 휠캡, 자동차 그릴 등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클러치페달, 와이어하네스까지 확대했습니다. 본격적인 부품 기술을 얻기위해 영국의 루카스사와 암스트롱사 등 기술 제휴 협상도 이어 나갔습니다.

이듬해에는 사이드멤버(Side Member), 크로스멤버(Cross Member), 퓨얼탱크(Fuel Tank) 등 프레스 부품뿐 아니라 히터(Heater), 엔진 라디에이터(Engine Radiator)와 같은 자동차 기능 부품들로 제품선을 키워나갔습니다.

 

4. 자동차부품 완전 국산화로 점프하다

현대양행은 안양공장의 성장에 발맞춰 그때까지 수입에 의존해오던 자동차부품의 연차적 국산화를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핵심 기술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장기적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정인영 명예회장의 의지를 강력히 반영한 결과였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양행은 1970년 2월 일본 도키코사와 쇽업소버 등 경차부품 생산을 위한 기술제휴를 체결했고, 그해 4월에는 미쓰비시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고 스타트모터(Start Motor), 얼터네이터(Alternator), 디스트리뷰터(Distributor) 등의 생산을 개시했습니다. 더불어 미국의 미첼 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고 카쿨러(Car Cooler) 생산도 함께 개시했습니다. 이처럼 기술제휴를 통한 끊임없는 기술개발 결과 현대양행은 1972년 전장품과 경차 부품의 완전 국산화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양행 안양공장은 또한 1975년 7월 세계 최대의 브레이크 기업인 영국 루카스 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브레이크 시스템 생산에 들어갔고, 1976년 12월에는 영국의 캠기어 사로부터 EASC(전자식 자동 평형 제어장치) 제조 기술을 도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어 1977년 12월에는 일본의 고요세이코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스티어링 시스템을 생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잇단 자동차부품의 국산화와 국내 자동차 산업의 성장에 힘입어 안양공장은 1979년 연산 15만 대 생산규모로 증설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1970년대 말 안양공장은 브레이크, 스티어링 등 첨단 자동차부품을 비롯해 쇽업소버, 레귤레이터, 얼터네이터, 스타트모터, 이그니션코일, 혼, 엔진 라디에이터, 히터 및 각종 프레스 부품 등 300여 종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 자동차 부품공장으로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곳이 훗날 '만도(MANDO)'란 이름의 세계 초우량 부품 기업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꿈을 갖고 신념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라

(Dream it, belive it and just do it)

- 정인영 명예회장의 좌우명-

 

정인영 명예회장은 '성공은 꿈꾸는 자의 몫'이라는 경구를 신념으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불굴의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은 이 땅에 중공업의 기반을 이룩하였고, 오늘의 글로벌 한라의 정신적 기반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